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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황산잔도 물금 양산옛길을 찾아서 (국제신문 연제시리즈 옛길을 찾아서 발취)
기술김
2012. 8. 29. 09:23
- 용화사로 가는 길에 황산잔도
- 험한 벼랑 선반처럼 달아 낸 길, 장사꾼들 자주 떨어져 죽기도
- 황산역터 있던 일아정 복원 등 옛 길 다시 열어가는 사업 진행
- 토목위주 아닌 문화 관점 접근을
사뱃재(사배고개)를 넘는다. 부산과 경남 양산의 경계다. 지금에사 자동차로 씽씽 가볍게 넘지만, 옛날에는 험준해 괴나리 봇짐을 싸든 양반·상놈 할 것 없이 몇 번씩 쉬지 않고는 넘지 못했다는 고개다.
고갯마루에 향토사학자 두 분이 나왔다. 정진화(79) 양산향토사연구회장(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과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이다. 연만한데도 늘 발로 뛰면서 향토사의 빈틈을 메우고 있는 분들이다.
정 회장이 복사해 온 지도 뭉치를 꺼낸다. "이게 있어야 옛길을 찾아요. 1917년 일제시대 5만분의 1 지적도야. 여기에 영남대로(황산도)가 그려져 있어요."
■내송천 따라 가는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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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향교의 찰방 비석들. |
지방도를 따라 양산시 동면 사송리, 외송리를 넘겨보며 동면사무소 쪽으로 내려간다. 사송리 일대는 머잖아 신도시가 들어선단다. 길 옆으로 내송천이 흐른다. 영남대로는 내송천을 따라간다.
동면사무소에서 약 700m 내려간 곡각지. 정 회장이 일행을 세운다. "이곳이 바로 전진뱅이(바위)야.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이 바위 뒷길에 숨어 왜군들을 창으로 찔러 내송천으로 떨어뜨렸다고 하지. '전진(前陣)'은 전방진지란 뜻이야." 무심하게도, 현장에는 어떤 흔적이나 자취도 없다.
양산 다방삼거리에서 양산시청 앞을 지나 중앙로를 통해 남부사거리와 남부시장을 지나자 양산성당 앞에 다다른다. 양산성당 부근이 옛 양산읍성 서문터라 하고, 동헌(東軒)이 현 중앙동 주민센터(옛 군청), 객사가 현 양산기장축협 자리라고 하는데,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600년 넘은 읍성이 속절없이 시가지에 깔려버린 탓이다.
■양산천의 월천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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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 물금취수장 옆 옛 영남대로 상에 복원되고 있는 황산잔도. |
"옛날엔 이곳에 월천꾼이 있었어요. 사람을 업어 내를 건네주는 일을 업으로 삼던 사람이지. 큰 물이 지면 나타나 일을 하곤 했어요. 그것도 무슨 벼슬이라고 수령이나 군수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지."
영대교 건너편 양산향교 앞에서 옛길은 두갈래로 나뉜다. 좌측으로 가면 물금길, 우측으로 가면 언양·밀양·경주길이다. 낙동강의 범람으로 황산도가 물에 잠기면 언양길이 한양으로 가는 대체로가 됐다. 대동여지도 상에 등장하는 윤산역(輪山驛)은 언양길을 지원하던 역참으로 보이며, 현 유산동 양산공단 내 화승화학 근처로 추정된다.
고지도를 보면, 양산에는 동래~양산~밀양을 잇는 영남대로 본도 외에, 언양~자인~대구길, 울산~경주길, 기장길, 김해길(뱃길), 감동포(구포)길 등 7개의 길이 뻗어 있다. 이 길 위에 16개 역을 관리하던 황산찰방역이 물금에 자리한다. 양산은 그만큼 교통 요충지였다.
■메기들의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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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등 앞쪽의 너른 들판을 '메기들'이라 했어요. 양산앞들·석산앞들·물금들을 모두 합쳐 그렇게 불러요. 양산천과 낙동강이 맞닿은 삼각주지역이라 큰 물이 지면 범람을 해 메기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지요."(주영택 원장)
이런 사정에도, 조선 후기 간악한 관리들은 과세를 하여 민초들의 허리를 꺾었다. 이전 관리들과 달리, 1866년께 호위영대장을 지낸 정원용(鄭元容)과 경상도 관찰사 서헌순(徐憲淳), 양산군수 심락정(沈樂正)은 민초들의 고통을 헤아려 메기들에 대해 면세조치를 해 주었다. 청룡등 5부 능선 자락에 세워진 3기의 공덕비는 이러한 사정을 전해준다. 영남대로는 공덕비가 있는 청룡등 동쪽 기슭을 돌아 물금 쪽으로 향한다.
이 메기들이 옥토로 바뀐 건 100년이 채 안 된다. 상습 침수지로 수 천년 동안 거의 버려진 땅을 1925년 양산천 개수공사 후 경작이 가능해졌다. 이곳에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으니 또 한번 상전벽해다.
■벼랑 끝의 황산잔도
영남대로는 물금읍 서부리 물금초교 앞에서 1022번 지방도를 버리고 강변을 파고든다. 물금취수장을 지나 용화사로 가는 길이 그 유명한 '황산베리끝', 바로 황산잔도(黃山棧道)다. 잔도는 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 서부리 촌로들은 "워낙 험해 장꾼들이 한 잔 걸치고 지나다가 자주 빠져죽기도 한 곳"이라고 말한다.
황산잔도 주변에는 이런 저런 유적이 많다. 동래부사 정현덕의 불망비가 있고, 시인 묵객들이 노닌 경파대(鏡波臺)라는 강 바위가 자리한다. 잔도 위쪽 오봉산 자락에는 신라 말 최치원이 유상한 임경대(臨鏡臺)가 있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는 황산베리끝을 무대로 삼았다. 양산 화제리가 처가인 요산은 "그 당시의 '황산베리끝' 하면 좁기로 이름난 벼룻길로서…" "제사장을 보아서 머리에 이고 그놈의 베리끝을 돌아오자니, 언덕 위에 쌓였던 눈까지 휘몰아쳐…" 식으로 험한 황산잔도의 사정을 묘사했다.
경부선 철로에 깔린 이 옛길이 '거짓말처럼' 복원되고 있다. 국토해양부와 양산시는 현재 물금취수장에서 원동취수장까지 황산잔도 1.9㎞ 구간을 자전거 도로 겸 탐방로로 조성 중이며, 계속해서 삼랑진까지 이어지는 강변 길을 열어가고 있다. 양산시는 황산역터에 일아정을 재현하고 임경대 유적지도 정비할 채비다. 애환이 흐르는 영남대로 일부가 '깨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영남대로 복원 사업이 토목 위주가 아니라, 문화 중심, 길의 원형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되길 바라고 있다.
# 황산 찰방역은
- 중앙직속 관리 배치…동래 언양 밀양 등 16개 역 관할
- 역리·노비 8800여명, 말 46마리 배치
- 최고책임자인 찰방, 군수 치정 견제
- 지금은 텃밭으로 바뀌어 황량함만…"역사관 만들어 교육·관광에 활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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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에 그려져 있는 영남대로(황산도)와 황산역(하얀색 원 부분). |
"이곳이 황산도 16개 역을 관리하던 황산찰방역 자리야. 양산시에서 복원하겠다는 일아정(日哦亭)은 저쪽 산기슭이지."(정진화 회장)
황량한 황산역터다. 육안으로 보이는 건 집터의 잔해와 텃밭뿐이다. 수천 명이 활동했다던 황산역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황산 찰방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로, 윤산·소산·덕천·간곡·아월역 등 동래·언양·밀양 등지의 16개 역을 관할했다고 '영남역지'에 나와 있다. 이곳엔 역리 7638명과 남녀 노비 1176명, 큰 말 7마리, 중간 크기 말 29마리, 짐 싣는 말 10마리 등 모두 46마리의 말이 배치됐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이곳의 최고 책임자인 찰방은 종6품으로 중앙 직속이었다. 어사가 순찰을 돌 때 보필하고, 군수(종3품)의 치정을 견제하기도 했다. 황산 찰방역은 철종 8년(1857) 낙동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기자,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로 옮겨졌고, 1895년 역원제 폐지 때 사라졌다. 상삼리의 역터도 이제 전설로만 남았다.
정 회장을 따라 대밭 뒤편으로 올라가자 아담한 무덤 하나가 나왔다. '정헌대부(正憲大夫) 경주 김씨'라 적힌 것으로 보아 벼슬깨나 한 인물 같다. 정 회장은 "황산역의 역리 후손으로 보이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조선시대 역리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교통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다. '영남대로'의 저자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민 사회를 '신양역천'(身良役賤·양인 신분으로 천한 일을 맡음)의 등질집단으로 본다. 최 명예교수는 "황산역의 김씨 문중에서는 대원군 시대에 무과에 급제해 경상감영의 중군에 오르거나, 그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도 있었다"면서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역민의 신분이 향상된 것 같다"고 했다.
양산시가 복원하겠다고 나선 일아정은 황산역의 10여 개 건물에 딸린 정자 가운데 하나다. 정진화 회장은 "황산역이 갖는 역사 문화적 무게를 감안하면, 일아정을 복원할 게 아니라 황산역 역사관(기념관)을 만들어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게 맞다"고 조언했다.
협찬: 화승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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