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나무아래/지리산

영남대로-양산

기술김 2012. 8. 29. 09:35

   
부산 금정구 하정마을의 황산도(영남대로) 옛길. 하정마을에는 황산도 속역인 소산역이 자리했으며, 비석과 마방터 등이 남아 있다. 박창희 기자
- 향토사학자 주영택 탐사에 동행, 황산도 기·종착점 휴산驛 위치 논란
-'대낫들이 길' 동래부사 이·취임 행렬, 길로 번성한 하정마을 새 길로 고립

"어데 가능기요?"

"걸어서 한양 갈라 캅미더."

"아이고, 그 먼데를 우째 갈랑교?"

동래읍성 동헌 앞에서 한양천리 떠날 채비를 하자, 동래시장(부산 동래구 수안동)에서 행상 하는 할머니가 걱정스레 말을 건다. 먼길 떠나는 자식 걱정 같다. 배낭을 고쳐 매고 워킹화 끈을 동여맨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조상들은 괴나리봇짐에 짚새기 대여섯짝을 달아매고 수시로 바꿔 신으며 저린 발로 눈물고개를 넘었다.

한양은 왜 가는가. 잊혀진 우리 옛길, 황산도, 작천잔도(삼랑진), 팔조령(청도), 유곡도(문경), 멱조고개(용인), 말죽거리(서울)를 찾으러 간다. 한양 가는 길이 지방과 통하므로, 한양으로 가야 막힌 게 뚫리므로.

■이름 뿐인 휴산역

   
황산도(黃山道) 탐사의 첫 동행자는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주 원장은 부산 동래에서 양산~삼랑진~밀양을 잇는 황산도 옛길을 찾아낸 향토사학자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을 흔히 '영남대로'라고 부르지만, 동래~밀양 구간은 황산도가 원래 명칭이다.

"휴산역(休山驛)을 찾아봐야 해. 그곳이 황산도의 기·종착점이거든. 부산 길의 원형이 되는 역참인데 그 존재를 모르고들 있으니…."(주영택 원장)

휴산역은 문헌에만 존재하는 역이다. '동래부읍지' 역원조에는 '휴산역은 동래부의 남쪽 1리에 있으며, 북쪽의 소산역과 20리 떨어져 있다. 중마 2필, 짐말 5필, 역리 58명이 있다'고 기술돼 있다. 위치는 논란이 따르는데, 주 원장은 현 동래경찰서(옛 농주산 자리) 일대로 본다. 좌수영에서 오면 이섭교(현 연안교 아래)를, 부산진에서 오면 광제교(현 세병교)를 지나온다. 따라서 휴산역에서 해안 포구를 거쳐 해외로 나갈 수 있고, 동남 해안의 역로로 울산-경주 쪽으로 갈 수 있다.

조선 후기 황산도에는 동래부 관할의 휴산역과 소산역(蘇山驛)을 포함해 16개소의 속역이 있었다. 당시의 역(驛)은, 오늘날 터미널 이상의 기능과 역할이 부여됐다. 역에는 역마(驛馬)를 배치하여 관청의 공문서 전달, 진상 공납물의 수송, 공무 여행자를 지원했다. 주 원장은 "휴산역 자리를 찾아 표지석이라도 세워 놓아야 한다"고 했다. 사라진 휴산역에서 '휴~' 한숨을 쉬는 노학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비친다.

■대낫들이 길을 지나며 

휴산역에서 동래향교·명륜초등교 앞을 지나 마안산을 바라보며 온천 입구 사거리로 향한다. 동래읍성 암문에서 온천 입구 사거리까지는 '대낫들이 길'로 불리는 곳. 동래부사가 이·취임할 때 기치창검을 세운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대) 나들이라 했다는 것이다. 명륜초교 뒤편 파리바케트 빵집 앞에 작달막한 표지석이 서 있다. 대낫들이 길에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1836년 대흉년 때 민영훈 동래부사가 천 포대의 곡식을 풀어 만민구명(萬民救命)을 했어. 굶어 죽게 된 백성을 살린거야. 이에 탄복한 두구·작장·남산마을 주민들은 이듬해 민 부사 이임때 대낫들이 길에 적삼을 벗어 밟고 걸어가게 했다는 거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장면 아닌가."(주영택 원장)

대낫들이 길을 벗어나면서 1592년 임진왜란 때의 그 사내들을 떠올린다. 부산진과 다대진의 첨사 정발과 윤흥신을 차례로 죽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선봉대는 동래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적에게 한양 가는 길을 내줄 수 없다"며 목숨을 버렸고, 경상좌도 군사책임자인 이각(경상좌부사)은 겁을 먹고 북문지기를 죽인 후 도망쳤다. 송상현(당시 나이 42세)은 짧게 살고 불멸의 충신으로 부활했지만, 이각은 목숨을 부지했지만 영원한 비겁자로 전락했다. 길에서 빚어진 순간적인 판단의 결과가 섬뜩하도록 무섭다.

■소산역 가는 길

온천 입구 사거리에서 명륜로로 직진하면 공수물 소공원(금정구 부곡2동)에 다다른다. 공원에 '부사민영훈거사단'이 옮겨져 있다. 만민구명의 덕을 잊지않은 두구·작장·남산마을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다. 원래 황산도 길목인 지경고개(금정구 노포동 녹동마을)에 있던 것을 1993년 이곳으로 옮겼다.

공수물마을에서 조금 더 가면 부곡3동 기찰(譏察)마을이다. 고지도에 나오는 십휴정기찰(十休亭譏察)은 지금의 금정농협 기찰지점이다. 기찰은 요즘으로 치면 검문소다. 기찰포교(捕校)를 주재시켜 통행자나 신분, 물품 등을 검문검색했다. 동래여고 앞 체육공원로를 따라가면 왼쪽편에 태광산업이 있다. 옛날 '역들'이라 불린 자리다. 과거 소산역의 경비 조달을 위해 지급된 역전이 있었다고 한다.

브니엘중고교를 지나자 소산고개가 나온다. 고개 너머에 소산역이 있다. 지금의 금정구 하정마을이다. 소산고개는 임진왜란 때 아군이 방어선을 치고 전투를 벌인 곳으로, 동래성서 빠져나온 경상좌부사 이각이 도주한 길이다. 관군의 방어선이 무너진 곳에 지역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싸웠다. 이른바 소산전투다. 주 원장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장수들이 숨고 도망 가서 전열이 흐트러진 곳에 상현마을 출신의 김정서 의병장이 나타났어. 그는 기장의 김일덕 오흥 의병장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소산역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지. 그러니까 김정서는 임란 최초의 의병이었고, 소산고개는 조선 의병의 발상지야."

고개를 넘어 상현마을 입구 사거리에서 좌회전,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하정마을이다. 마을 입구 신일농원 가는 길이 황산도 옛길이다. 옛길을 따라 노포동 고분길→팔송 경찰초소→작장마을→대룡마을→지경고개까지 이르는 길가엔 영세불망비, 신도비 등이 즐비하다. 옛길을 증언하는 비석들이다.

하정마을의 노인정이 역터, 개울가가 마방터라고 하고, 지금의 당산나무 옆에서 거릿대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현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한가하기만 하다. 오히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40여호의 변두리 마을이 더욱 고립된 형국이다. 길로 번성한 역촌이 길로 인해 고립돼 버렸으니 길의 무정이다.


# 동래읍성 6개 중 골샘 하나만 남아

- 사라지는 옛 우물
- "우물 살려야 지역문화에 생기 "

   
부산 동래구 복천동의 골샘. 형태가 정확하게 '井'자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福泉洞)은 복이 넘치는 우물을 가진 동네였다. 이름이 그렇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가 동래부 읍내면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야정동(野井洞) 등으로 일컬어졌다. 어김없이 우물이 들어 있다. 우물은 가담항설이 모이는 자리로,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또 옛길이 우물 옆을 지나는 경우가 많아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동래부지'에는 동래읍성 내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돼 있다(문헌에 따라선 최대 10개까지 나온다). 그만큼 우물이 성했다. 동래구청사 뒤의 큰샘, 옛 동래여고 자리의 옥샘(옥처럼 맑은 우물), 내성초등학교 앞의 들샘(들판에 있는 우물), 복천동 우성베스토피아 앞의 골샘 등이 이름값 하는 우물로 꼽힌다. '옥샘'은 동래여고 교지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우물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동래구 이정형(46) 문화재 전문위원은 "많은 우물들이 도시개발 과정에서 다 파묻혔고, 이제 골샘 하나 정도가 겨우 남아 있다"고 전했다.

골샘은 안내자 없이는 찾기가 어렵다. 복천동 우성 베스토피아 앞 유성탕 골목 안쪽에 자리잡은 골샘은 정확한 '井'자 석곽 형태다. 가로×세로 약 2m, 높이가 약 30㎝ 정도인데, 겉보기에도 연륜이 느껴진다. 이 전문위원은 "1731년 동래읍성 확장 때 석곽이 만들어졌다고 보면, 최소 300년 역사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우물도 뚜껑이 닫혀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은 "사람이 살려면 우선 우물을 파서 물을 먹어야 하므로, 마을의 역사가 우물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면서 "금샘으로 유명한 금정산의 수맥이 이곳까지 닿아 있을 것이므로 우물을 살리는 것은 지역문화를 살리는 것이다"고 말했다.

협찬: 화승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