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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삼랑진과 원동 사이의 영남대로 상에 조성된 작원잔도 측면 전경(점선). 천태산 벼랑에 가까스로 석축을 쌓아 폭 1~2m의 벼룻길을 냈다. 정진화 양산향토사연구회장 제공 |
- 영남대로 상에 조성된 벼룻길…일제 철도공사 피해 원형 보존, 4대강 자전거도로 코앞까지
- 양산 화제~삼랑진 30여개 주막, 모두 논밭이나 갈대숲으로 변해
대동여지도 상의 황산역(양산시 물금리 부근)에서 다음 역인 무흘역(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부근), 나아가 밀양, 청도까지의 영남대로는 일제 때 놓인 경부선 철도와 거의 일치한다. 한양으로 가는 최단 코스였기 때문이다. 영남대로는 관로(官路)인 탓에 양인이나 하층민들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두려운 길이었다. 양산 화제리의 한 촌로는 자신의 조부가 낙동강 벼룻길인 황산잔도를 지나다 동래부사 행렬과 마주쳤는데, '길을 막는다'며 역졸이 밀치는 바람에 강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흙다리가 돌다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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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리의 자연마을 중 토교(土橋)는 이름 그대로 영남대로가 통과하던 흙다리가 있었던 곳.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돼 있는 화자교(火者橋)가 곧 흙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火)로 쓰인 것은 화제리의 불메골에 쇠를 벼리던 쇠부리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도 화제토교(火濟土橋)로 표시돼 있다.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잘 허물어지던 토교는 영조 때 마침내 돌다리로 고쳐진다. 이때 세워진 양산화제석교비(梁山花濟石橋碑)가 토교마을에 남아 있다. 비석에는 석교의 이름과 위치, 세운 내력과 감독한 관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시 공역에 참석한 동네는 이천·내포·범서·화제·증산·범어·별양·어곡리 등 8곳이고, 세운 때는 1739년(영조 15) 3월이다. 이 비석은 화제석교가 영남대로 상의 관로임을 알려주고 있다.
■사라진 주막거리
조선 후기 영남대로에는 곳곳에 주막촌이 성행했다. 주막은 관청이 운영하던 원(院)과 구별되는 일종의 민영 숙박업소. 대개 한 두 개의 침실과 술청으로 돼 있고, 밥과 술값은 받지만 숙박비는 따로 받지 않았다.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영남대로에는 약 100곳의 주막촌이 형성돼 있었고 평균 간격은 약 4㎞였다.
양산 화제~삼랑진 사이에도 주막이 적지 않았다. 원동면 서룡리의 신주막(새술막)에는 한창 때 보부상과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30여 채의 주막과 함께 신주나루가 있었다. 하지만 자취는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모두 전답과 갈대숲으로 변했다.
신주막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철길 좌측으로 나란히 놓인 영남대로는 원동면 원리의 원동역을 지나면서 철길 우측 편으로 꺾여 천태산 자락을 파고든다. 가는 길에는 가야진사(원동면 용당리)가 있다. 신라 눌지왕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했다는 역사적인 나루터다.
천태산 자락에는 하주막과 상주막이 있었다. 하주막은 원동면 중리마을 바로 위에, 상주막은 삼랑진읍 검세리 원래 작원관(鵲院關) 부근의 대밭 자리라고 한다. 작원관은 원(院)·관(關)·진(津)의 역할을 담당하던 영남대로의 첫번째 관문. 천태산이란 천험의 요새를 지나는 길목이어서 이곳만 막으면 누구도 육지로는 통행이 불가능 했다.
영남대로 복원 범시민위원회 이종규(41) 사무국장(삼랑진청년회 부회장)이 상주막에 얽힌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작원관의 문은 일몰과 함께 잠긴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그네들은 상주막에 들러 자야 하지요. 이때 상주막 주모들이 손님을 많이 모으려고 작원관의 기찰포교나 포졸에게 로비를 하여 문을 빨리 닫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재미있는 민담이다.
작원관은 신라군이 가야를 치기 위해 나아갔던 요로였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의 관민 300여 명이 왜적 1만8000명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벌인 격전지기도 하다.
■신비한 작원잔도
원동면 중리마을을 지나면 낙동강과 산이 딱 붙어서 걸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진다. 1900년초 대륙 침략을 획책하던 일제는 경부선 철도 공사를 벌인다. 철도마저 놓을 수 없는 공간엔 터널을 뚫었다. 그 덕분에 영남대로의 벼룻길인 작원잔도(鵲院棧道) 일부가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작원잔도의 원형을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양산향토사연구회 정진화(79) 회장은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자전거 도로에 어떻게 됐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문화재로 지정해 후세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에게 작원잔도의 존재를 알려준 이는 원동 중리마을에 사는 서영도(83) 옹. 이곳 토박이인 서 옹은 담담하게 잔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몇 백년 된 옛길인데 쉽게 없어지나. 사람 손길이 안닿으면 남지. 어릴 때 천태산 벼룻길에서 소 먹이고 풀베고 그랬어. 동네 사람들이 삼랑진 장을 오갈 때도 더러 이용했지."
남아 있는 작원잔도 구간은 볼수록 신비했다. 까마득한 절벽에 걸린 외줄기 길과 그 길을 떠받힌 석축, 그 배경이 되고 있는 천태산…. 현장을 함께 본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74) 원장은 "조상들이 이런 황홀한 길을 걸어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떨린다"면서 "문헌에 나오는 원추암(員墜岩)을 밟는 감회도 남다르다"고 말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전에 한 수령이 지나다가 떨어진 까닭에 원추암이라 한다'고 해 놓았다.
4대 강 자전거 도로 공사는 작원잔도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다행히 밀양시와 뜻있는 시민들의 요청으로 잔도 구간 일부를 보존키로 했다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문화재 지정 작업이 우선인데도 현장에선 공사 강행 태세다.
현장 지표조사를 진행 중인 우리문화재연구원 이상현 연구원은 "1900년 초 일제가 철도 부설을 구실로 영남대로를 마구 훼손했지만, 작원잔도처럼 원형이 남은 곳이 없지는 않다"면서 "서울~부산에 이르는 영남대로 전 구간을 조사하여 보존할 곳은 지금이라도 조치를 취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 삼랑진 '처자교 유적' 어찌되나
- 영남대로 일부 실체 드러내…물길 터서 관람용 복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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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삼랑진 낙동강변의 처자교 유적. |
2010년 봄 4대 강 사업 낙동강 12공구인 삼랑진 강변에서 신기하게도 처자교 유적이 드러났다. (재)우리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처자교는 낙동강으로 흐르는 지천 위에 세운 쌍홍예의 석조 교량으로, 너비 4.2m에 발굴된 길이는 25.3m다.
최영준(70·전 문화재위원) 고려대 명예교수는 "처자교가 놓인 길이 영남대로다. 지방에서 이런 수준의 다리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면서 "작원관과 작원잔도를 연계해 원형을 살려 복원 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처자교 건설에 얽힌 얘기는 복원된 작원관에 옮겨져 있는 작원진석교비와 작원대교비에 소개돼 있다. 유적이 확인됨으로써 전설과 기록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처자교 유적은 발굴 후 보고서만 남긴 채 다시 흙으로 덮였다. 부산국토관리청은 "현장은 강변 저습지로 유적 보존이 어렵고 추가 발굴 대상지도 아니다"며 한발을 빼는 모습이다. 밀양시는 영남대로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와 함께 처자교 유적을 경남도 문화재로 등재할 계획이다.
삼랑진청년회 이종규(41) 부회장은 "저습지라 하지만 물길을 터서 관람용으로 복원해 놓으면 훌륭한 교육·역사자원이 될 수 있다"면서 "이 참에 인근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승교 발굴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양의 뜻있는 시민들은 지난 23일 '영남대로 복원 범시민추진위원회' 창립 총회를 갖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섰다. 실체를 드러낸 영남대로 일부가 복원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협찬: 화승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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