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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찍은 부산 범어사 물레방앗간 전경. 김한근 부산불교문화연구소장 제공 |
- 온천수 솟는 샘·계란 익는 수온 등 동래 온천장의 모습 詩에서 그려
- 일제강점기 대지주였던 범어사, 도정위해 물레방앗간 12채 건설
- 돌확과 다듬돌 등 흔적 남기도
'온정(溫井, 온천장), 십휴정(什休亭, 기찰), 소산역(하정마을), 범어사, 계명봉, 금정진(금정산성), 동문, 만덕현(만덕고개)…'.
19세기 후반 동래부지도와 군현지도에 등장하는 지명들이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황산도(黃山道·영남대로의 마지막 구간)의 갈랫길이 거미줄처럼 엮인 것이 이채롭다. 이게 단순한 길이 아니다. 한양과 동래(부산), 동래의 각 성과 진, 동래와 일본(왜) 간의 숨가쁜 역사가 그 속에 흐르는 탓이다.
■신라 왕이 다녀간 온정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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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계곡에서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이 옛 물레방아 유물을 조사하고 있다. |
황산도, 특히 동래길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한 데엔 온천이 한몫 한 것임에 틀림없다. 동래 온천의 명성은 삼국시대부터 자자했던 것 같다. '신라 31대 신문왕(683년) 때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동래 일원)의 온정에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삼국유사)
고려시대 최고 문장가 중 한 명인 이규보(1168~1241)는 '동박공장향동래욕장지구점이수(同朴公將向東萊浴場池口占二首)'라는 시에 동래 온천장의 모습을 그려냈다. 시 속에는 목욕탕이 아니라 온천수가 콸콸 솟는 샘 아래에 못이 있어 그곳에서 목욕을 했고, 물이 뜨거워 계란을 익히고 차까지 달여 먹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유명해져 온정을 관리하는 관속인 온정직을 두었고, 욕객들을 위해 온정원을 설치하고 역마까지 두었다. 1766년(영조 42년) 동래부사 강필리는 아홉칸짜리 집을 지어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이를 지키는 대문을 설치했다. 그때 세운 온정개건비(부산시기념물 제14호)가 온천동 농심호텔 후문 쪽의 용각 뜰에 있으며, 동래온천번영회가 관리하고 있다.
동래를 찾은 관리와 사신, 여행자 등이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여독을 푸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온정 가는 옛길은 동래읍성 암문 또는 북문에서 온천교를 지나면 곧바로 닿는다. 거리는 고작 5리. 신라 왕이 경주에서 행차할 때는 수레를 타고 언양과 양산을 거쳤거나, 울산 쪽에서 소산역을 따라 오는 코스를 택했을 것 같다.
■금정산성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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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석재는 화강석으로 높이 185cm 너비 72cm 두께 35cm다. 비석에는 금정산성의 초축에서 부설 때까지 경위와 공사 내용, 작업 참여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어 사료가치가 높다.
부설비가 위치한 곳은 금정구 장전동 금정초등학교에서 산쪽으로 200m쯤 떨어진 벽산 블루밍 아파트 공사장. 아파트 공사 관계자는 "비석이 거대한 자연암반에 박혀 있어 옮기기가 어렵고, 입주민들이 좋아해 소공원을 조성해 존치키로 했다"고 말했다. 아파트 측으로선 뜻하지 않은 '보물' 하나를 안은 셈이지만, 산성 진입로에서 비켜난 점이 못내 아쉽다.
■범어사 옛길
범어사(서기 678년 창건) 옛길도 온정 가는 길 못지않게 오래 됐다. 황산도(영남대로)에서 가려면 십휴정 기찰(검문소, 현 금정구 부곡3동)을 지나 구서마을~두실~남산교~서거덤마을~남중마을~팔송정을 거치게 된다.
소나무 8그루와 정자가 있었다는 팔송정은 도시철도 범어사역 7번 출구 바로 위쪽(현 현대자동차운전학원 자리)이다. 답사에 동행한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은 "바로 위쪽이 팔송진이고, 큰길 건너편이 포구산이다"면서 수영강의 뱃길 역사를 끌어다 붙인다. "임진왜란 때 좌수영을 무너뜨린 왜적이 수영강을 따라 팔송진에서 범어사를 공격해 왔어. 3·1 독립만세 운동 때 범어사 스님들은 범어사 옛길~팔송~포구산의 길을 따라 동래장터로 가서 만세를 불렀고…. 팔송진, 포구산은 수영강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야."
범어사 옛길은 범어정수장(1932년 준공)을 지나 경동아파트를 거쳐 계명봉 오솔길로 이어진다. 계명봉과 양산 사송리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범어사 방향으로 300여m 오르면 '금어동천(金魚洞天·신선이 사는 절경)'이라 새겨진 큼직한 바위를 만난다. 바위면에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윤필은(尹弼殷)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금 더 가면 '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1872년) 등 5기의 비석이 자리한 비석걸에 이른다. 동래부와 범어사의 내밀한 교류를 말해주는 역사 현장이다.
■범어사 물레방아의 추억
범어사 조계문(曹溪門·일주문의 다른 이름)을 지나 계곡길을 오르면서 주 원장이 묻는다. "범어사 물레방아 이야기 들어봤소?" "그런 게 있었습니까…."
범어사 성보박물관 뒤편 주차장 옆의 범어천 계곡. 흩어진 자연석 속에서 돌확과 원주(圓柱) 형태의 다듬돌을 찾아낸 주 원장이 또박또박 얘기했다. "이게 물레방아 흔적이야. 쌀을 도정하는 데 쓰는 절구나 방아를 걸었던 돌이거든. 이곳에 물레방앗간이 12채나 있었다잖아."
주 원장의 자료 조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때 범어사는 사유답(寺有沓)이 5000마지기에 이를 정도로 대지주였다. 동래, 금정, 양산 등에서 걷는 소작료만 1만석이 넘었다.
1924년 소작인은 1456명. 이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소질메와 지게에 나락(소작료)을 싣고 범어사 옛길을 따라서 운반했다. 이것을 도정하려다 보니 물레방앗간이 필요했고, 수량이 풍부한 범어천이 적지였다. 이 물레방앗간은 해방 전후까지 돌아갔다고 한다.
부산불교문화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물레방앗간은 범어사의 자립경제를 말해주는 풍물로,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재현하면 훌륭한 문화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레방앗간 유물 일부는 성보박물관 옆 야외전시장에도 흩어져 있었다. 범어사 정종학 기획처장은 "몇몇 스님들이 희미하게 물레방앗간을 기억하고 있더라"면서 "문화재 가치를 따져 복원 여부를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범어사 물레방아는 '흘러간 물'이 아니라 되돌려야 할 추억 같았다.
# 황산도의 공덕비들
- 한국 최초 관세제도 이끈 이만직, 역원 복지 애쓴 내용의 비석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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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직의 이 같은 업적은 황산도에 남아 있는 비석에서 확인된다.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 비석걸에 있는 '수의상국이공만직영세불망비(繡衣相國李公萬稙永世不忘碑)'에는 이만직이 소산역의 세금 삭감과 역원 복지를 위해 애쓰고 조정에 해관 설치를 건의한 내용이 실려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은 "이만직은 이를테면 '통상 무역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며 "사료가치 때문에 한때 부산세관박물관에서 옮겨가려고 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하정마을에 있는 '황산이방최연수애휼역졸비(黃山吏房崔延壽愛恤驛卒碑)'는 상관이 부하를 위해 세운 이색 송덕비. 내용인즉, 이방 최연수가 역졸을 아끼고 보살피는 인격과 덕망이 높아 이방으로 있기에 아깝다는 뜻에서, 소산역과 휴산역의 도장·수리 상관이 1697년(숙종 23년)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 두 기의 비석은 원래 하정마을 비석걸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던 것을 주 원장이 발견했고, 2007년 12월 금정구가 하정마을 들머리에 복원해 놓았다.
하정2길을 따라가면 황산도는 경부고속도로에 막힌다. 다시 체육공원로로 나와 영락공원 가는 굴다리를 지나면 금정도서관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이 황산도다. 부산톨게이트 옆 갈록산 기슭 길섶에 이상한 형태의 불망비 2기가 서 있다. 18세기 중엽 동래부사를 지낸 정이검과 조재민을 각각 기리는 불망비다. 원래 한 개의 자연석 바위에 나란히 새겨진 마애비였으나, 도로개설 과정에서 분리돼 600m 가량 위쪽으로 옮겨져 따로 복원됐다. 정이검 비석(사진)은 머릿부분에 금이 가 있다. 주 원장은 "2010년 11월 트럭으로 옮기다가 부주의로 땅바닥에 떨어뜨려 석두가 깨진 것"이라며 이나마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애처로운 황산도의 이정표들이었다.
협찬: 화승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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